서문 — 질문을 바꾸기
AI와 일에 관한 논의는 대개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어떤 직업이 사라지고 어떤 직업이 살아남는가. 이 글은 그 질문이 반쪽이라고 본다. 직업은 일의 원래 모양이 아니라, 일과 사람과 돈을 잇는 특정한 장치가 만들어 낸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 장치를 이 글은 경제기계라고 부른다. 채용공고, 이력서, 학위와 자격증, 근로계약, 월급, 사회보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 지붕 아래 묶는 회사. 누구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휘하지 않는데 매일 수천만 명이 일터로 가고 매달 임금이 지급되는 것은, 이 장치들이 정해진 규칙대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장치이므로 설계할 수 있고, 낡으면 다시 설계해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이 묻는 것은 세 가지다. 이 기계는 지금까지 어떻게 연결해 왔는가. 그중 무엇이 아직 단단하고, 무엇이 언제부터 어떻게 풀려 왔는가. 그리고 풀린 자리에 무엇이 아직 설계되지 않았는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이 아키링크(ArchiLink)라는 작업이 필요한 이유가 된다.
1부 — 경제기계는 어떻게 이어 왔나
경제기계가 풀어야 하는 문제는 단순하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값을 치를 돈이 있다. 이 셋을 매번 맞붙이는 일은 비싸고 위험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일을 제대로 할지, 값을 제때 치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근대 경제기계는 이 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연결을 굳히고 묶는 장치들을 쌓아 왔다.
회사: 연결을 한 지붕 아래 묶는 장치
로널드 코스는 1937년 논문 「기업의 본성」에서 물었다. 시장이 그렇게 효율적이라면 왜 회사가 있는가. 그의 답은 거래비용이었다. 매번 시장에서 계약을 맺는 비용이 비싸면, 연결을 회사 안으로 끌어들여 끝없이 재협상하지 않고 지시로 대체한다. 회사의 경계는 시장에서 잇는 비용과 안에서 묶는 비용이 만나는 자리에 그어진다. 이 통찰은 이 글 전체의 축이다. 회사는 연결 비용이 만든 구조물이다.
직업: 과업을 묶어 사람에게 붙이는 단위
회사 안에서 연결은 다시 ‘직업’이라는 단위로 굳는다. 직업은 여러 과업을 한 사람 몫으로 묶은 꾸러미다. 이 꾸러미에는 과업만 담기지 않는다. 자리(직급과 직책), 다달의 임금, 사회보험,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대답까지 함께 담긴다.
도린저와 피오레가 1971년에 이름 붙인 내부노동시장은 이 꾸러미들이 어떻게 사다리로 이어지는지 보여 준다. 바깥 시장으로 열린 문은 맨 아래 입구뿐이고, 그 위는 회사 안의 승진과 연공으로 채워진다. 한국의 대기업 정기공채와 연공급은 이 구조가 가장 단단하게 굳은 형태였다. 한 번에 많이 뽑아, 회사가 가르치고, 오래 있을수록 값이 오른다.
자격: 모르는 사람을 믿게 만드는 장치
연결의 가장 큰 비용은 상대를 모른다는 데서 나온다. 학위와 자격증은 이 비용을 대신 치러 주는 장치다. 마이클 스펜스는 1973년 학력을 ‘신호’로 설명했다. 학위가 능력을 기르지 않더라도, 능력 있는 사람이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면 고용주에게 쓸모 있는 신호가 된다. 랜들 콜린스의 『학력 사회』(1979)는 더 날카롭다. 학위는 능력보다 지위 집단의 문을 지키는 열쇠로도 작동한다. 어느 쪽이든, 자격은 ‘모르는 사람과 연결해도 된다’는 보증서 역할을 해 왔다.
임금과 사회보험: 값과 보호를 고용에 매단 장치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1944)에서 노동을 ‘허구 상품’이라 불렀다. 노동은 팔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데 시장이 상품처럼 다루기 시작했고, 그러자 사회는 스스로를 지키려고 보호막을 덧댔다. 20세기 중반의 ‘표준적 고용관계’는 그 보호막의 한 형태다. 시간 단위로 매긴 임금, 무기계약, 그리고 고용에 붙어 있는 연금·건강보험·산재보험. 값을 치르는 방식과 사람을 보호하는 방식이 모두 ‘고용됨’이라는 하나의 고리에 매달렸다.
배움: 회사가 비용을 대는 도제
게리 베커(1964)는 일반적 숙련과 기업 특수적 숙련을 구분했다. 내부노동시장이 단단할수록 회사는 신입을 가르치는 비용을 기꺼이 냈다. 오래 남을 사람이라면 투자를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입의 입구는 곧 배움의 입구였다.
한눈에 보는 지금의 경제기계
| 무엇을 잇나 | 장치 | 이론적 설명 |
|---|---|---|
| 일 ↔ 일을 하는 조직 | 회사 | 코스, 거래비용 (1937) |
| 과업 ↔ 사람 | 직업·직무기술서·내부 승진 | 도린저·피오레, 내부노동시장 (1971) |
| 모르는 사람 ↔ 신뢰 | 학위·자격증 | 스펜스, 신호 (1973) · 콜린스, 학력 사회 (1979) |
| 일 ↔ 돈·보호 | 시간 임금·무기계약·사회보험 | 폴라니, 허구 상품과 보호막 (1944) |
| 신입 ↔ 배움 | 사내 도제·신입 교육 | 베커, 기업 특수적 인적자본 (1964) |
| 흩어진 정보 ↔ 결정 | 가격 | 하이에크, 지식의 사회적 이용 (1945) |
이 장치들은 따로 돌지 않는다. 회사가 직업을 만들고, 직업이 자격을 요구하고, 자격이 임금을 가르고, 임금에 보호가 붙는다. 하나의 톱니바퀴가 돌면 나머지가 따라 돈다. 그래서 이것을 ‘기계’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톱니 하나의 크기가 바뀌면 기계 전체가 어긋난다.
2부 — 아직 견고한 것
‘직업의 종말’이라는 말은 자주 앞서간다. 경제기계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단단하다. 새 기계를 말하려면 무엇이 풀리지 않았는지부터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첫째, 학위라는 신뢰 장치. ‘학위 대신 기술로 뽑는다’는 선언은 많았지만 실제 채용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버닝글래스 연구소는 대기업들의 채용을 추적해, 학위 요건을 없앤 효과가 연간 채용 700건 중 1건에도 못 미쳤다고 보고했다(2024). 공고 문구는 바뀌었지만 사람을 믿는 장치는 그대로다. 대체할 신뢰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책임의 귀속. 결재와 서명은 여전히 사람과 법인에 붙는다. AI가 보고서를 쓰고 계약서를 검토해도, 틀렸을 때 책임지는 주체는 고용된 사람과 그를 고용한 회사다. 일은 과업 단위로 흩어지는데 책임은 여전히 직업과 조직 단위로 묶여 있다. 이 어긋남이 뒷부분의 핵심 쟁점이 된다.
셋째, 보호의 고리. 사회보험과 노동법의 보호는 여전히 ‘근로자’라는 지위에 매달려 있다. 다만 이 고리는 무너지는 중이다. 한국은 2023년 7월 산재보험의 ‘전속성’ 요건을 없애 여러 플랫폼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노무제공자’로 보호 범위에 넣었고, 한 달 사이 가입자가 크게 늘었다. 보호를 고용에서 떼어 ‘일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붙이려는 보완 움직임은 이미 시작됐다. 하지만 기준은 여전히 ‘사람이 누구에게 속하는가’이지, ‘어떤 과업을 누가 맡았는가’가 아니다.
넷째, 사다리의 위쪽. 생성형 AI의 첫 충격은 이미 자리를 가진 사람보다 들어오려는 사람에게 갔다. 스탠퍼드 연구진의 급여 자료 분석에서, AI 노출이 높은 직종의 22~25세는 고용이 상대적으로 13% 줄었지만 같은 직종의 경력자는 안정적이거나 늘었다(2025). 기계의 위쪽은 단단하고, 맨 아래 입구가 먼저 흔들린다.
다섯째, 자본의 그릇. 자본은 여전히 주식과 회사라는 그릇을 통해서만 일에 닿는다. 하나의 과업, 한 사람의 숙련, 작은 팀의 일에 자본이 직접 붙는 길은 거의 닫혀 있다. 그래서 일이 풀려 나오면 자본은 일을 따라가지 않고, 풀려 나온 일을 모아 중개하는 플랫폼에 모인다.
정리하면, 일을 수행하는 부품은 작아지는데, 일을 믿고·책임지고·보호하고·자본을 붙이는 부품은 여전히 크다. 경제기계의 균열은 이 크기 차이에서 생긴다.
3부 — 흔들리고 풀려 온 과정
경제기계는 AI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풀리고 있었다. 흐름은 한 방향이다. 일을 잇는 단위가 회사 → 계약 → 앱 → 과업으로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단위가 작아질 때마다 신뢰·보호·배움의 장치는 따라오지 못했다.
| 시기 | 무엇이 풀렸나 | 근거 |
|---|---|---|
| 1980년대~ | 회사의 경계가 바깥으로 밀려남 | 데이비드 와일, 『균열된 일터』(2014) |
| 2003 | 경제학이 ‘직업’이 아닌 ‘과업’을 단위로 보기 시작 | 오터·레비·머나임의 과업 기반 접근 |
| 2010년대~ | 연결을 앱이 대신 맺기 시작 | 한국 플랫폼 종사자 2023년 88만 3천 명 |
| 2019~2022 | 한국 대기업 정기공채의 해체 | 현대차 2019, LG 2020, SK 2022 전면 폐지; 삼성만 상·하반기 공채 유지 |
| 2025 | 과업 단위로 AI 적용 범위를 감사하는 데이터가 나옴 | 스탠퍼드 WORKBank: 104개 직종 844개 과업 |
| 2025 | 신입의 입구가 먼저 좁아짐 | 스탠퍼드 ‘탄광 속 카나리아’: 22~25세 상대 고용 13% 감소 |
| 2025 | 사람이 기계를 가르치는 일이 별도 시장으로 등장 | 머코어 기업가치 100억 달러, 전문가 3만여 명에게 하루 150만 달러 이상 지급 |
회사의 경계가 바깥으로
데이비드 와일은 이를 ‘균열된 일터’라고 불렀다. 대기업은 ‘핵심 역량’만 남기고 청소·경비에서 시작해 점점 더 중심적인 일까지 외주·프랜차이즈·공급망으로 내보냈다. 코스의 논리를 뒤집으면 이해된다. 통신과 표준화로 바깥에서 잇는 비용이 내려가자 회사는 줄어들었다. 주목할 점은, 대기업이 품질과 가격은 세세하게 통제하면서 고용 책임은 밖으로 밀어냈다는 것이다. 일은 연결돼 있는데 책임의 연결은 끊긴 최초의 큰 사례다.
직업에서 과업으로
2003년 오터·레비·머나임은 기술이 직업 전체가 아니라 직업 안의 ‘반복적 과업’을 대체한다고 봤다. 이 시각은 이후 일자리 양극화 논의의 기반이 됐고, 아시모글루와 레스트레포는 여기에 ‘새 과업의 복원’이라는 반대 힘을 더했다. 같은 전통에서 오터 등은 2018년 미국 고용의 대부분이 1940년 이후 새로 생긴 직무에 있으며, 새 일은 사람을 대체하는 혁신이 아니라 사람의 산출을 보완하는 혁신에서 나온다고 보여 주었다. 이 발견은 뒷부분에서 중요하다. 새 일은 저절로 오지 않고, 무엇을 보완하도록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연결을 앱이 대신하다
플랫폼은 채용공고·면접·계약을 한 번의 터치로 압축했다. 연결 비용이 거의 0에 가까워지자 일은 건 단위로 나뉘었다. 하지만 앱이 대신한 것은 ‘매칭’뿐이었다. 사람을 믿는 장치는 별점으로, 보호는 개인의 몫으로, 배움은 없는 것으로 남았다. 한국에서 플랫폼 노동을 둘러싼 근로자성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채의 해체
한국의 정기공채는 내부노동시장의 가장 단단한 입구였다. 2019년부터 대기업들이 이를 현업 부서가 필요할 때 뽑는 수시채용으로 바꾼 것은, 회사가 ‘한꺼번에 뽑아 가르치는’ 역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배움의 비용이 회사에서 개인에게로 넘어간 것이다.
과업을 기계가 가져가고, 사람은 기계를 가르친다
생성형 AI는 이 흐름을 두 방향에서 더 밀었다. 한쪽에서는 코드화하기 쉬운 과업, 즉 대학에서 배우는 지식에 가까운 과업을 가져갔고, 그 충격은 신입에게 먼저 갔다. 다른 한쪽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연결이 생겼다. 의사·변호사·분석가가 자기 판단을 기계가 배울 수 있는 데이터로 바꾸고 시간당 대가를 받는 시장이다. 머코어는 채용 플랫폼으로 시작했다가 AI 연구소에 전문가를 연결하는 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새 연결은 경제기계의 낡은 규칙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전문가는 시간제 계약자이고, 그가 가르친 판단이 모델 안에서 끝없이 복제돼도 그 몫은 한 번의 시급으로 끝난다. 자본은 전문가가 아니라 연결을 추산하는 플랫폼에 모였다. ‘누가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는가’를 정하는 규칙이 없으니, 연결의 값은 연결을 쥔 자에게 흘러간다.
4부 — 관련 담론과 아이디어 지도
풀려 가는 경제기계를 두고 이미 많은 논의가 있다. 이것들을 ‘기계의 어느 부품을 보는가’로 다시 배열하면 공통의 빈칸이 드러난다. 각 담론은 기계의 한두 부품을 깊게 본다. 그러나 연결 전체를 하나의 설계 대상으로 놓는 담론은 드물다.
| 담론·아이디어 | 핵심 주장 | 보는 부품 | 비어 있는 것 |
|---|---|---|---|
| 일자리 대체·AI 노출 연구 (프레이·오스본 2013, 엘룬도 등 2023) | 어떤 직업이 얼마나 위험한가 | 과업 ↔ 수행자 | 위험을 셀 뿐, 풀린 과업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묻지 않는다 |
| 과업 기반 접근·새 과업 이론 (오터, 아시모글루·레스트레포) | 기술은 과업을 대체하고 새 과업을 만든다 | 과업 ↔ 수행자 | 설명은 하지만 새 연결을 설계하는 주체는 두지 않는다 |
| 증강 대 자동화 (브린욜프슨 ‘튜링의 덫’, WORKBank의 인간 행위 척도) | AI를 사람을 대신하지 말고 보완하는 쪽으로 | 과업 ↔ 수행자 | 사람과 에이전트가 섞인 과업의 대가·책임 규칙은 비어 있다 |
| 기술 기반 채용·디지털 배지·역량 여권 | 학위 대신 증명된 기술로 사람을 믿는다 | 신뢰 | 선언에 비해 실천이 미미하다(채용 700건 중 1건 미만) |
| 균열된 일터·플랫폼 노동 규제 (와일, EU 플랫폼노동지침) | 일을 통제하는 자에게 책임을 돌려준다 | 규칙·보호 | 거의 ‘고용인가 아닌가’라는 기존 범주 안에서 푸는 방식이다 |
| 데이터는 노동이다 (래니어, 포즈너·와일 『래디컬 마켓』 2018) | 기계가 배우는 데이터를 만드는 사람에게 값을 치러야 한다 | 대가 | 실제 정산 장치는 없고, 시장은 시간제 계약으로 먼저 굴러간다 |
| 기본소득·고용 밖 소득 | 일과 소득의 연결을 느슨하게 한다 | 대가·보호 | 생계는 보호하지만 일을 잇는 기계 자체는 건드리지 않는다 |
| 매칭 시장 설계 (앨빈 로스) | 연결은 규칙으로 설계할 수 있다 | 과업 ↔ 수행자·규칙 | 설계의 단위가 여전히 사람과 자리(전공의·학교)다 |
| 1인 기업·‘원맨 유니콘’ 담론 | 개인이 에이전트로 전체를 경영한다 | 자본·수행자 | 개인의 역량 문제로 다루고, 그걸 받치는 제도는 묻지 않는다 |
| ‘수고 경제’·‘원본 인간’ (송길영) | 반복 과업은 기계로 가고, 사람을 향한 수고와 일을 설계하는 사람에게 가치가 모인다 | 대가·수행자 | 대중적 예보로서 강력하지만, 그 가치가 어떤 장치를 통해 정산되는지는 다루지 않는다 |
이 지도에서 두 가지가 보인다.
첫째, 담론의 대부분은 설명하거나 예보한다. 어떤 과업이 위험한지, 가치가 어디로 옮겨 가는지는 잘 보여 준다. 그러나 ‘그럼 풀린 과업을 누가 어떤 규칙으로 다시 잇는가’에는 대답이 없다.
둘째, 설계를 말하는 담론은 한 부품만 다룬다. 기술 기반 채용은 신뢰만, 플랫폼 규제는 책임만, 데이터 노동 담론은 대가만, 기본소득은 보호만 바꾼다. 하지만 1부에서 보았듯 경제기계의 부품들은 서로 맞물려 돈다. 신뢰 장치만 바뀌면 대가와 책임이 따라오지 않고, 보호만 바뀌면 일을 잇는 방식은 그대로다. 기술 기반 채용이 ‘선언에 머문 것’도 신뢰 부품 하나만 바꾸려 했기 때문일 수 있다.
5부 — 빈자리: 아키링크가 필요한 이유
여기까지의 논의를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다. 일은 과업 단위로 풀려 나오는데, 그 과업을 신뢰·대가·책임·배움·자본과 한 번에 다시 묶는 일을 아무도 자기 일로 삼지 않고 있다.
왜 아무도 하지 않는가
각 주체는 자기 자리에서 보이는 부품만 만진다. 정부는 ‘근로자인가 아닌가’라는 범주로 보호를 늘린다. 기업은 자기 비용과 효율을 기준으로 과업을 나눈다. 플랫폼은 매칭 수수료가 나오는 만큼만 잇는다. 학계는 변화를 정밀하게 설명한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연결 전체는 어느 누구의 책상 위에도 없다.
그 결과는 3부의 머코어 사례가 보여 준다. 새 연결의 규칙을 별도로 설계하지 않으면, 가장 먼저 그 연결을 쥐어 돈을 돌리는 주체의 관행이 곧 규칙이 된다. 문제는 그 관행이 나쁘냐가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비교되기 전에 굳어 버린다는 점이다.
왜 지금인가
코스의 논리를 다시 빌리면, 연결 비용이 바뀌는 시기에는 회사의 경계가 다시 협상된다. 지금이 그 시기다. 경계가 다시 그어지는 동안 정해진 규칙은 오래 간다. 20세기의 표준적 고용관계가 그랬듯이. 또 오터 등의 연구가 보여 주듯, 새 일은 사람을 대체하는 방향이 아니라 보완하는 방향에서 나온다. 어느 방향으로 연결을 설계하느냐가 새 일의 양과 질을 가른다.
아키링크가 하려는 일
아키링크는 이 빈자리를 자기 일로 삼는다. 이름이 그 두 축을 담는다. Architecture, 일의 구조를 설계한다. Link, 그 구조를 사람·자본·규칙과 잇는다.
- 읽기 — 직무를 과업 단위로 풀어 구조를 드러낸다. 기존 직무 분류 체계로 먼저 해 보고 어디서 어긋나는지 기록한다.
- 잇기 — 과업을 목록이 아니라 연결도로 그린다. 어떤 과업이 어떤 과업에 기대는지, 사람과 에이전트가 어디서 바통을 넘기는지.
- 맺기 — 풀려난 과업을 사람·팀·자본과 새로 묶는 연결을 설계한다.
- 정하기 — 그 연결이 굴러가도록 보증·정산·책임의 규칙을 제안하고 공개한다.
왜 플랫폼이 아니라 연구소로 시작하는가
플랫폼을 먼저 만들면 연결을 쥐는 또 하나의 중개자가 될 뿐이다. 빈자리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매칭이 아니라, 매칭을 포함해 연결 전체를 볼 수 있는 개념과 언어, 그리고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설계도다. 그래서 순서는 개념과 분석(콘텐츠) → 연결 규칙(프로토콜) → 그 규칙을 돌리는 장치(플랫폼)이다. 마지막 단계는 아키링크가 직접 할 수도, 다른 주체가 할 수도 있다.
아키링크가 아닌 것
- 채용 플랫폼이 아니다. 사람과 자리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의 구조를 설계한다.
- 미래 예측 기관이 아니다. 어떤 직업이 사라질지가 아니라, 풀린 일을 어떻게 다시 이을지를 다룬다.
- 측정만 하는 곳이 아니다. 과업을 읽는 것은 네 단계 중 첫 단계일 뿐이다.
정직한 한계
이 제안에는 열려 있는 약점도 있다. ‘연결 전체를 설계한다’는 말은 쉽게 추상으로 떠다닌다. 그래서 첫 작업은 거창한 설계도가 아니라 실제 직무 하나를 기존 틀로 분해해 보는 것이다. 또 규칙을 제안하는 것과 규칙이 채택되는 것은 다르다. 채택에는 정부·기업·노동자의 협상이 필요하고, 누가 어떤 권한으로 제안하느냐는 물음을 피할 수 없다. 아키링크가 모든 걸 공개하는 것은 이 정당성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답이다.
열어 두는 끝 — 세 갈래 길과 그 위험
풀린 연결이 다시 묶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지금 보이는 갈래는 적어도 세 가지다.
- 관행이 규칙이 되는 길. 연결을 먼저 쥔 플랫폼과 대기업의 방식이 사실상 표준이 된다.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값은 연결을 쥔 쪽으로 모인다.
- 기존 범주를 넓히는 길. ‘근로자’의 범위를 계속 넓혀 보호를 덧대는 방식이다. 한국의 산재보험 전속성 폐지처럼 실제 성과가 있지만, 일을 잇는 방식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 연결 규약을 공개적으로 설계하는 길. 과업 단위의 신뢰·대가·책임 규칙을 열린 설계도로 만들고 여러 주체가 가져다 쓰게 하는 길이다. 아키링크가 걸려는 길이지만, 가장 느리고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세 갈래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 현실은 아마 셋이 섞인 모양일 것이고, 물음은 그 비율이다.
세 번째 길에도 위험이 있다. 일을 과업 단위로 잘게 읽을수록, 그 읽기는 더 촘촘한 통제와 감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돌봄·관계·판단처럼 과업으로 잘 쪼개지지 않는 일은 설계도에서 오히려 안 보이게 될 수도 있다. 연결을 설계한다는 말이 누구의 이익을 위한 설계인지도 늘 따라붙는다.
그래서 이 글은 답보다 질문을 남긴다.
- 풀린 과업에 어떤 단위의 책임을 붙일 수 있는가?
- 사람이 기계를 가르친 몫은 한 번의 시급으로 끝나야 하는가, 아니면 지속되는 지분이 될 수 있는가?
- 자본이 회사라는 그릇을 거치지 않고 작은 단위의 일에 닿는 길은 무엇인가?
- 과업으로 잘게 읽는 것이 감시가 아니라 협상력이 되려면, 그 읽기는 누가 쥐어야 하는가?
이 질문들을 실제 직무 위에서 하나씩 시험해 보는 것이 아키링크의 첫 작업이다.
참고 자료
- Brynjolfsson, Chandar, Chen (2025), Canaries in the Coal Mine? Six Facts about the Recent Employment Effects of AI
- Autor, Chin, Salomons, Seegmiller (2024), New Frontiers: The Origins and Content of New Work, 1940–2018
- Weil (2014), The Fissured Workplace
- Sigelman, Fuller, Martin (2024), Skills-Based Hiring: The Long Road from Pronouncements to Practice
- Shao et al. (2025), Future of Work with AI Agents (WORKBank)
- TechCrunch (2025.10.27), Mercor quintuples valuation to $10B · Revenue Memo, Mercor funding
- 머니투데이 (2026.9.7), SK·현대차·LG·한화 수시채용 안착 · YTN (2024.9.3), 4대 그룹 하반기 채용
- 한국경제 (2026.3.15), 플랫폼 종사자 88만 3천 명 · 프레시안 (2024.6.3), 산재보험 전속성 폐지 전후
- 고전 문헌: 코스(1937), 폴라니(1944), 하이에크(1945), 베커(1964), 도린저·피오레(1971), 스펜스(1973), 콜린스(1979), 오터·레비·머나임(2003), 포즈너·와일(2018)
- 송길영 작가, CBS 라디오 인터뷰